캐나다 온타리오에서는 일단 3월 14일부터 4월 5일까지 학교가 문을 닫았는데(3/16 - 3/20은 원래 March Break)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동안 학교를 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다. 그나마 나는 약간 한적한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뒷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있어서 심심하면 바깥공기라도 쐴 수 있다지만 대도시의 콘도에서 살고 계신 분들은 아이들과 집안에 갇혀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어서 빨리 지나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튼 집에만 있다 보니 뭐라도 해야 보람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뒷마당에 있는 메이플 나무(우리나라의 단풍나무와는 종류가 다르니 그냥 메이플 나무라고 하자)에서 수액(Sap)을 조금 받아다가 졸여서 시럽 비슷하게 만들어 보았다. 오늘 이야기는 이 메이플 시럽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전라남도 여수에서 시작했는데 그곳에서는 봄이면 고로쇠물을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일하던 팀에서도 매년 봄마다 산장 같은 곳에 모여서 고로쇠물을 마시고는 하였다. 서울에서 자란 나는 그때까지 고로쇠물은 TV에서나 들어보았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고로쇠물을 마시러 간다길래 가서 보니 흔히들 말하는 '말통'에 뿌연 고로쇠물이 가득 담겨있는 것이었다. 아마 2~3통의 고로쇠물이 반갑게 나를 맞이하여 주었는데 문제는 그것들을 다 마셔야지만 집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아무리 못해도 일인당 4~5리터는 마셔야 다 마실 수 있는 분량이었다. 더욱 문제는 이 날은 단순히 고로쇠물만 마시는 날이 아니라 여느 회식날과 똑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한편으로는 물도 마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본격적으로 고로쇠물을 마시는데 처음 맛을 보니 약간은 달달한 것도 같은데 뭐 이게 설탕물인지 진짜 고로쇠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어쨌든 다들 처음에는 냉면 사발을 이용하여 의욕적으로 고로쇠물을 마셨다. 그런데 마셔도 마셔도 물이 줄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술자리에서 하는 게임을 하면서 진 사람이 마시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마시고 또 마셨다.
이 고로쇠물을 마실 때면 어르신들이 항상 하는 말이, '고로쇠물은 아무리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으니까 많이 많이 마셔라'이었다(분명 몸에 좋다는 말도 들었는데 무엇 때문에 몸에 좋은지, 무엇에 좋은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런데 실제로 고로쇠물을 배가 터질 때까지 마셨지만 한 번도 배탈이 나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에 내가 젊었거나(벌써 딱 10년 전의 일이다) 아니면 고로쇠물은 정말 아무리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나 보다. 그런데 당시에 마셨던 것이 설탕물이면 어떡하지?
어쨌든 여수를 떠나오면서 고로쇠물은 그렇게 기억에서 한동안 잊혀졌다.
시간은 흘러서 캐나다에 왔는데 알버타와 사스카추완에서 살다가 온타리오로 처음 이사를 와서 놀랐던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온타리오에는 나무가 무척이나 많다는 것이다. 특히나 사스카추완은 그저 허허벌판이라서 나무도 드물게 있는데 오랜만에 무척이나 많은 나무들을 보니 신기하였다. 그중에서도 메이플 나무가 참 많은데 이곳에서 처음 가을을 보내면서 본 단풍이 지는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그리고 봄이 되면 이 메이플 나무에 구멍을 내서 수액(Sap)을 받아다가 시럽을 만드는데 이 또한 볼만한 광경이다. 매년 이맘때 온타리오나 퀘벡 곳곳에 있는 Sugar Bush(또는 Sugar Shack)에 가면 이렇게 수액을 받아서 메이플 시럽을 만드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다. 물론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대부분 문을 닫았겠지만.
우리 가족은 2019년에야 처음으로 이 Sugar Bush에 가보았는데 가서 보고 있자니 이것은 예전 고로쇠물을 마시던 산장이 생각이 났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서 수액을 받는 모습이 완전히 똑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고로쇠나무가 바로 메이플 나무와 같이 단풍나무의 한 종류였다. 이럴 수가! 이렇게 명확한 사실을 이제야 눈치채다니...
그래서 같이 갔던 캐나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는 이 수액을 받아다가 그냥 마신다고 하니 다들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캐나다에서는 수액을 조금씩 맛을 보긴 하지만 우리처럼 발칵발칵 마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대부분 수액을 불에 졸여서 시럽으로 만드는데 이때 약 40:1 비율로 졸여야 우리가 보는 메이플 시럽이 된다고 한다.
참고로 나 또한 왜 우리나라에서는 고로쇠물로 시럽을 만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인터넷에 있는 정보로는 고로쇠물은 당도가 너무 낮기 때문에 시럽을 만들 수 없다고 하는데, 고로쇠물과 메이플 수액(Maple Sap)을 모두 마셔 본 경험자로서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메이플 수액은 확실히 달다.
한편 지난 주말 겨우내 벼르고 있었던 뒷마당 메이플 나무들의 가지치기를 결행하였다. 여기가 기후가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이놈의 메이플 나무들의 성장 속도가 빨라서 그런지 여름이면 정말 나무가 엄청나게 자란다. 또 가지마다 무수히 많은 나뭇잎이 생기는데 나뭇잎의 크기 또한 말 못 하게 거대하다. 여름에는 그늘이 생겨서 좋기라도 하지만 가을이 되면 대재앙이 시작되는데,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과 씨앗들의 양이 정말 어마어마어마하다. 우리 집 뒷마당에 있는 세 그루의 나무에서 떨어진 잎들과 씨앗을 치우려면 코스트코에서 파는 나뭇잎 봉투 25개가 모자랄 지경이다.
그 때문에 이번 봄에는 나무가 더 커지기 전에 가지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지를 치려고 보니 작년 경험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메이플 나무는 구멍만 뚫어도 수액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놈들도 꼴에 건장한 메이플 나무들이라고 가지를 자르니 잘린 부분에서 수액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어차피 집안에 갇혀서 할 일도 없는 차에 잘되었다 싶어 애들도 보여줄 겸 가지치기를 하고 나서 수액을 조금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잘린 가지 밑에다가 플라스틱 컵을 달아 놓았다. 그랬더니 반나절만에 꽤나 많은 양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와이프가 이것을 졸여주었다(처음에는 귀찮아했지만 블로그 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열심히 도와주었다). 40:1로 졸여야 된다고 들어서 과연 이것을 프라이팬에 졸인다고 될까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오래 졸이지도 않았는데 곧 색깔이 노래지는 것이었다.
비록 불순물은 많지만 완성된 우리의 첫 메이플 시럽! 더 졸이면 정말 시럽 같아지겠지만 올해는 연습이라고 생각해서 이만큼만 졸였다. 숟가락으로 살짝 떠서 맛을 보니 꽤나 달았다. 처음에는 심심한 아이들을 위해서 모아 본 메이플 수액이었는데 내가 더 신났다. 그리고 내년에는 제대로 구멍을 내서 몇 리터 받아다가 시럽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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