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검사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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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 발생했던 끔찍했던 아폴로 1호의 화재 사고를 뒤로 하고 NASA는 1968년 4월까지 무인 우주선인 아폴로 4호, 5호, 6호를 발사하였다. 이 미션을 통하여 커맨드-서비스 모듈, 루나 모듈 그리고 새턴 V 로켓 등을 우주로 보내 테스트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68년 10월. 드디어 아폴로 1호 사고 이후 처음으로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폴로 7호이다.

 

(*) 참고로 아폴로 2호, 3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NASA에서 유인 우주선인 AS-204부터 아폴로 1호로 명명하여 그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2호, 3호가 되는 식이었다. 그러나 AS-204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비행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다음 유인 우주선들이 취소가 되었다. 그런데 AS-204의 사고 발생 이후 유가족에 뜻에 따라 이것이 아폴로 1호로 지정되었고 NASA에서는 그전에 발사된 3번의 무인 우주선들이었던 AS-201, AS-202, AS-203를 아폴로 1-A호, 2호, 3호로 지정하는 것을 고려하였다. 하지만 이것들의 이름들은 변경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화재 사고 이후 처음 발사되는 무인 우주선부터 아폴로 4호라고 지정하였다(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상세 내용은 https://www.popsci.com/blog-network/vintage-space/what-happened-apollos-2-and-3/ 참조

 

 

1968년 10월 11일. 아폴로 7호 발사 모습 (사진: NASA)

 

아폴로 7호의 멤버들은 바로 아폴로 1호의 백업 멤버였던 월리 쉬라(Walter "Wally" Schirra), 돈 아이슬(Donn Eisele), 월터 커닝햄(Walter Cunningham)이었다. 그리고 이번 미션의 목적은 아폴로 1호 사고 이후 새롭게 설계한 아폴로의 커맨드-서비스 모듈의 첫 번째 유인 비행이었다. 

 

사실 모든 아폴로의 모든 미션들이 그렇겠지만 아폴로 7호도 매우 중요한 미션이었다. 특히나 시기적으로 매우 중요했는데 만약 이번에도 발사에 실패하거나 우주 비행사에게 사고가 발생한다면 아폴로 프로그램 자체에 큰 의문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엄청난 압박 속에서도 아폴로 7호는 기술적으로 매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계획을 했던 테스트를 모두 완벽에 가깝게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아폴로 7호 멤버들과 지상의 미션 컨트롤 사이의 갈등이 매우 컸다. 내가 확인한 모든 자료에서 이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나 커맨더였던 월리 쉬라와 미션 컨트롤 사이의 논쟁이 컸다. 월리 쉬라는 머큐리 프로젝트와 제미나이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우주에 다녀온 경험이 있었던 베테랑인데 그 미션 중에는 미션 컨트롤과의 관계가 매우 원만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폴로 7호 미션 중에는 미션 컨트롤의 지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아마도 아폴로 1호의 백업 멤버로서, 그리고 아폴로 1호 멤버의 동료로서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한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멤버들에게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NASA가 아주 어려웠던 시기에 성공적으로 미션을 수행한 아폴로 7호이지만 그 역할에 비해 역사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래도 눈에 확 들어오는 업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몇 가지 최초 사례가 있는데, 아폴로 프로그램 최초의 유인 비행이자 새턴 IB 로켓을 이용한 최초의 유인 비행이었고, 미국 최초의 3인 우주 미션이었고, 최초로 우주에서 TV 생중계가 이루어진 비행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미션의 성공으로 NASA는 그다음 이어질 아폴로 8호 미션에서 놀랍도록 담대한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미국 최초로 TV로 생중계가 된 아폴로 7호 미션. 이 방송으로 멤버들이 당시 에미상(Emmy Award)을 수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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