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검사의 하루

지난 2010년 당시만 하여도 한국에는 API 510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약 3~4년 앞서 한국가스안전공사에서 총 10일 일정으로 외국에서 강사를 초청하여 API 510 시험 대비 과정을 개설하고 실제 시험을 유치한 것이 국내에 이 자격증이 알려진 계기라고 알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 그 교육이 이루어졌을 때 나보다 3년 선배들이 처음 그 교육에 참가했는데 회사 돈으로 교육을 받고 시험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합격에 대한 압박이 엄청났다고 했다.

 

처음 교육에 다녀온 선배들은 교육에서 들은 내용 말고는 아무런 자료도 없었기 때문에(인터넷에 관련 정보도 없었거니와 국내에서는 이 시험을 봤던 사람도 없었을 테니) 시험에 떨어지지 않을까 엄청 걱정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만약 시험에 떨어지면 회사에 말하기 부끄러우니 정기적으로 시험이 열리는 싱가포르에라도 가서 시험을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아무튼 그 이후 매년 회사에서 API 510 교육을 보냈는데 2~3년 연속으로 보내다 보니 뭔가 식상해지는 맛이 있었나 보다. 회사 입장에서 이런 교육을 보내는 것은 꽤나 큰돈을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위 '성과'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매년 똑같은 교육을 보내자니 약간 약발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 1년 선배들의 경우 한 명은 API 510 교육에, 한 명은 CWI 교육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이제는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API 510 교육에 가고 싶었는데 CWI 교육보다는 이것저것 배우는 것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스안전공사에서도 몇 번이나 같은 교육을 유치하다 보니 수요가 떨어졌는지 이번에는 교육이 안 열릴 수도 있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래도 공사에서 수요 확인 끝에 다행히 API 510 교육이 열렸고 2010년 여름 천안에 있는 가스안전공사 수련원에서 교육을 듣게 되었다.

 

교육은 은근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ASME 관련된 사항들은 매우 기본적인 내용인데 당시 검사 3년 차인 나로서는 생소한 내용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WPS/PQR을 검토하는 것이라든지 ASME BPV Section VIII에서 두께를 계산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그전까지는 해볼 일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검사를 하는 사람(Inspector)이 그런 것도 모를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유 공정 관련 지식이나 부식 (Corrosion) 관련 지식은 나름대로 많았다고 생각하니 뭐 Inspector와 Reliability Engineer의 차이라고 생각하자.

 

아무튼 그렇게 수업을 듣고 나서 그 해 말에 모두들 교실에 모여서 시험을 보았다. 오프라인 시험이었기 때문에 모든 코드북을 들고 가야 했다. 감독하는 사람들은 한미 뭐시기 협회인가에 속한 아주머니들이었는데 시험을 보는 모든 사람이 한국 사람이었지만 맡은 역할에 충실하게 꿋꿋이 모든 것을 영어로 진행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한편으로는 약간 웃겼다). 너무 오래되어서 시험이 어땠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였고 2011년 1월 API 510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2011년 말, 이직할 때 다른 정유회사에 가서 국내에서 최연소 API 510 자격증 소유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시험을 본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다들 나보다 연차가 많았을 것이고, 나와 같은 나이에 시험을 봤다 해도 지금은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 아무렴 어떠리. 어차피 확인 가능한 것도 아니니 그냥 그렇다고 말을 하였다.

 

은근히 시간은 잘 흘러서 2013년 말 처음으로 API 510 자격증을 갱신할 때가 되었다. 당시에는 캐나다로 이민 갈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을 때이기 때문에 자비를 들여서 연장을 하였다. 그런데 막상 내 돈으로 연장을 하려니 돈이 무지 비싸게 느껴졌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API의 멤버 회사인 경우 약간 할인된 가격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마침 당시 다니던 회사의 자회사가 API의 멤버 회사인 것을 알게 되었고 API에 메일을 보낸 끝에 할인된 가격을 적용받을 수 있었다.


앞서 글들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듯이 캐나다에서 인스펙터로 일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API 510 자격증과 CWB Welding Inspector Level II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처음 구직활동을 할 때는 캐나다 내의 경력이 전혀 없고 CWB Level II가 없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래도 어떻게 일을 하게 된 곳이 주정부 관련 기관이었는데 사실 이때부터는 API나 CWB 자격증들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었다. 그저 National Board 자격들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래도 캐나다에서 처음 다녔던 회사는 자기 계발에 대한 지원이 무척이나 좋았다. 엔지니어 협회 등록 비용 및 검사에 관련된 자격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런저런 협회나 출판물에 대한 돈까지 지원해 주었다. 그때 때가 잘 맞아서 API 자격증들을 연장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어쩌다 보니 2016년 여름 온타리오 주정부 관련 기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하필 이때부터가 API 자격증들의 연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2017년 1월에는 API 510, 2017년 9월에는 API 570과 571 자격증 연장을 해야 했다(게다가 2018년에는 CWB 자격까지 연장을 해야 했다!). 회사에 자격증에 대한 비용 지원을 문의해 보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우선 API 510 자격은 연장을 하였다. 만약 또 다른 곳에 가게 된다면 이것은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2017년 9월이 되자 API 570 자격을 연장하여야 했는데, 이것은 뭐 다른 곳에 가더라도 있으나 없으나 큰 차이가 없어서 연장을 하지 않았다. API 571의 경우에는 시험을 너무 극적으로 통과했던 데다가 비용이 API 510이나 570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아서 연장을 하였다.

 

시간은 어찌나 빠른지 벌써 API 510을 이제 또다시 갱신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에도 사람의 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큰 마음을 먹고 갱신을 하려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그 사이 또 비용이 올랐는지 연장하는데 710불이나 되는 것이었다. 아마 2010년에는 지금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 같고 2017년에 연장할 때도 600불대였던 것 같은데 어마어마하게 올랐다.

 

 

API 자격증 비용(2019년 11월). 이것은 완전 인스펙터들 등쳐 먹는 수준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API 자격증들과 영영 이별을 할 때가 된 것 같다. 혹시 이직을 하더라도 캐나다에서 이 정도 일을 했으면 API 자격들이 없어도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있었는데 Expired 되었다고 하면 되니). 그리고 정말 이직을 할 일이 있다면 인스펙터보다는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자 이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더더욱 API 자격증들은 필요 없을 것이다.

 

한걸음 더 Oil and Gas Industries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앞으로 나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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