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검사의 하루

2017년 2월 11일 작성

 

 

다들 이민을 생각하는 이유는 비슷하겠지만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 최소한으로 하면서 내가 이민을 결정하게 된 이유를 쓴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하는 일과 직장에 회의를 느꼈고, 둘째는 경제적인 이유였다.

 

선 나는 원래 여수의 한 정유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대학 다닐 때는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는데, 재료공학과 출신의 사람이 정유소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입사 지원할 때 처음 알았다. 요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10년 전에는 재료공학과 (많은 대학에서 신소재공학과로 부르는 듯) 의 경우 주로 반도체 회사나 철강 회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내 미래가 그렇게 될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정유회사에서 검사, Inspection, 를 담당하는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히 입사 전 1년 동안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대부분 금속 관련된 수업을 다시 들어서 업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금속 관련 수업이 많이 줄어서 일본에서만큼 금속 관련 수업을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러가지 스트레스받는 일도 있었지만 나름 일은 재미있었다. 공장에 문제 (주로 부식)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가 안 생기도록 사전에 검사를 하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식, 용접, 비파괴 검사 등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아 좋았다. 안 좋은 점은 문제가 발생하면 낮이건 밤이건 평일이건 주말이건 전화가 온다는 것인데 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아직까지도 업무 이외의 시간에 전화가 오는 것이 무척이나 싫다. 비록 그것이 개인적인 연락이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4년 정도 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이직의 가장 큰 원인은 결혼 이후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였다고 하자. 동일한 업계의 회사이면서 구매팀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서울 생활이기도 하여 할 만했다. 그러던 중 시간이 갈수록 내가 이 일로 얼마나 더 벌어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경력 사원이다 보니 동기들도 없고 옛날 회사와도 비교도 되어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에 있던 사람들이 정말 별로였다.

 

둘째로는 서울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외벌이로는 집을 사기는커녕 오르는 전셋값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다는 결론에 회의가 들었다. 세금 떼고 한 달에 300만 원을 받아왔는데, 반전세 사느라 월세, 교통비, 식비, 유치원비, 전기/가스비를 내면 이건 뭐 인생에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2013년 여름 업무 때문에 미국 시카고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카고 교외의 Des Plaine 라는 곳이었는데 날씨도 좋은 6월에 잔디들은 푸르고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상대방의 회사와 미팅을 했는데 미팅 중간에 시간이 되면 한 두 명씩 일어나서 집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아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싶었다. 울고 싶었는데 뺨을 맞은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이 날의 출장 이후 나는 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다.

 

오래되어 몇 장 없지만 그래도 당시에 찍은 시카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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