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검사의 하루

이 글은 벌써 2번째로 옮겨오는 글이다. 최초에는 옛날에 조금 활동하던 카페에 올렸고, 그다음에는 구글 블로그스팟에 올렸다. 이제 모든 것을 옮기고 있으니 다시 한번 옮길 때가 되었다.

 

요즘 예전에 쓴 글들을 옮겨 오고 있다. 이 글은 2015년 8월 27일에 한 카페에 썼던 글이다. 약간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어서 별로 활동하지 않는 그곳에는 글을 삭제하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아무튼 글을 쓴 시기를 보니 첫 번째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이런저런 즐거움으로 살아갔던 때이다. 앞으로 1년 정도 뒤에 어떠한 광풍이 불어닥칠지는 전혀 모르고 말이다...

 

2017년 9월 23일 작성

 

 

며칠 쓸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꿈과 희망을 드리고자 한국에서는 공돌이, 캐나다에서는 엔지니어로 사는 것에 대해서 한 번 써볼까 합니다. 우선 엔지니어도 분야가 너무 많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모든 엔지니어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시작합니다.

 

한국에서 재료공학과, 한 때는 금속공학과라고 불렸던,를 졸업하고 만 26세에 지방 소도시에 있는 정유소에서 엔지니어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입사하자마자 유가가 사상 최초로 100불을 넘으며 상반기 영업 이익이 1조를 넘었다가 그해 하반기 유가는 30불까지 떨어지며 결국 연간 영업이익 겨우 몇 십억으로 그 해를 마감하게 됩니다. 당시 회사 내에 들리던 이야기로는 하반기에만 영업이익이 마이너스 2조 원을 기록하여, 연간 영업이익이 마이너스 1조라고 했지만 다양한 회계 기법으로, 보유한 원유 재고 금액을 재평가한다든지, 겨우 마이너스가 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매우 높으신 분의 아들과 주변분들이 주도적으로 말아먹었다고 하던데 모두 소문으로만 들은 사실이니 진실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진실일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덕에 그다음 해의 성과급은 창립 이래 최초로 0원이었습니다. 당시 차/부장님들은 성과급이 없으면 카드값을 어떻게 메꾸냐며 난리였지만 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과급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특별한 감흥은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2011년 한 해를 제외하면 생활이 나아질 정도의 성과급은 나온 적이 없습니다. 사실 나름 많이 나왔던 2011년의 성과급도 전자나 자동차 회사 다니는 친구들의 평균 성과급 정도이니 엄청 거대했다고도 하기 그렇습니다.

 

그렇게 정유소에서 4년 근무를 한 후 다른 정유회사로 이직을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본사 근무여서 서울에서 근무하였는데 정확히 한 달에 297만 원 정도 받았습니다. 회사 연봉 정책상 총연봉의 10%는 주지 않고 있다가 적자가 나지 않으면 다음 해 연초에 돌려주는데, 그것과 조금의 성과급을 하면 매달 저 월급 + 100만 원 정도가 실제로 받은 금액입니다.

 

반전세에 사니 월세 60만 원, 아이 교육비 60만 원, 교통비 10만 원, 저축과 보험 70만 원 통신비 및 Utility 30만 원, 식비 60만 원 하니 서울에서는 집을 사는 것은커녕 먹고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약간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저는 이래서 정유회사가 폭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적어도 직원들이 엄청나게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한 대부분의 기간 중 대학 동기 10명 중 저의 월급은 8등이었습니다. 정말 월급 적기로 소문난 철강 회사와 또 월급 적기로 유명한 어느 자동차 회사 이외에는 보통 저의 1.5~2배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솔직히 인정해서 근무 시간은 그네들보다 적긴 했습니다.

 

아무튼 당시에는 이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옛날 대학 시간에 들었던 수업이 생각이 났습니다.

 

'미국과 같은 이미 선진화된 사회에서는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없다  (빌 게이츠와 같은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의미가 없다). 계층 이동이 가능한 경우는 하층에서 중산층으로 가는 경우인데 그것도 할아버지가 죽어라 고생하고 아버지가 죽어라 고생한 후 자식까지 3대가 죽어라 고생해야 하층에서 중산층이 될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는 아직 기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육이다 아직까지는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직업은 우리나라에서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해 준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점 잘 주는 교양수업이라 대부분 수업을 듣지 않았는데 십 년이 넘도록 저 말은 기억에 남더군요.

 

그러던 중 회사에서 시카고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럽 출장 때는 몰랐는데 미국은 그야말로 신세계와 같았습니다. 6월이라 날씨도 좋았는데 주택가는 한가하고 잔디는 푸르렀습니다. 상대방 회사의 엔지니어들은 회의가 끝나지 않아도 퇴근 시간이 되면 집에 갔습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자마자 이민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관련 직종의 수요가 많은 중동이나 동남아시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게 웬걸, 와이프 직업이 캐나다 연방 전문 인력에 해당되는 것을 발견하고는 둘이서 영어 시험을 준비하여 서류를 접수하였습니다. 2013년은 EE가 도입되기 전이라 조금 수월하게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주권은 있어도 캐나다에서 먹고 살 일을 찾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이후 이야기는 몇 번 한 적이 있어서 간단히만 말씀드리면... 그래도 어떻게 운 좋게 이 회사에서 뽑아주어서, 또다시 장거리 이사를 해야 했지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만 놓고 생각해 보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학교 동기들이나 옛날 회사 동료들에게, 즉 엔지니어들에게, 해외로 나가라고 하고 싶습니다.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근무 시간이나 급여 등 대부분(사실은 전부)이 한국에서 일했을 때보다 좋습니다. 여기 동료들에게 한국에서의 엔지니어에 대한 대우를 말해 주면 모두 믿지 않습니다. 50살 정도 되면 다른 일을 찾아봐야 된다고 하면 절대 믿지 않습니다.

 

끝으로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정유소나 석유화학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셨던 분들이라면 캐나다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정유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거대하고 복잡한데, 이곳은 다른 이유로 그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Process Engineer, Mechanical Engineer 또는 Reliability Engineer로 근무한 사람들이라면 그 큰 공장에서 정말 온갖 문제와 상황에 직면했던 경험이 있으므로 이곳 엔지니어를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중동으로도 많이 나가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이민을 계획하시는 엔지니어분들께 조금이나마 희망을 드리고자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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