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검사의 하루

2017년 7월 21일 작성

 

 

정확한 날짜를 찾아보기 위해 예전 기록을 찾아보니 2015년 2월 10일의 일이다. 여전히 백수 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딸 아이를 유치원에서 픽업하고 오는 길에 지역번호가 306으로 시작하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아직도 이 전화를 받은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사실 TSASK와 전화 면접 이후 레퍼런스를 제출하고도 2주가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무척이나 초조해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기다리다 지쳐 면접을 진행했던 Chief Inspector 아저씨에게 전화도 걸어보았다. 전화를 안 받길래 어찌 진행되는지 알고 싶다는 보이스 메시지도 남겼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 Chief Inspector 아저씨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처음에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이제 그쪽으로 가서 면대면 인터뷰를 하자고 할 줄 알았다. 설마 전화 인터뷰만으로 면접을 끝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저씨가 축하한다며 함께 일하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하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는 당황해서 크게 기뻐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두 번째 면접은 안 하냐고 물어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물론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하였다.

 

아무튼 그렇게 전화를 받고 나니 참으로 기뻤다. 왜 나를 오라고 하는 걸까, 나중에 기회되면 왜 뽑았냐고 꼭 물어봐야지라는 생각도 하였다. 무엇보다 생각보다 빨리 직업을 찾게 되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컸다. 왜냐하면 2015년 2월이 되자 오일 가격이 급락한 여파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이제는 Inspector를 모집하는 공고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당연히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기회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무조건 이사를 하여 회사를 다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제 막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한 딸 아이 생각과, 또다시 엄청나게 먼 곳으로 이동을 해야하는 사실과, 듣도 보도 못한 시골 동네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족들의 반대가 만만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기회가 있을텐데 왜 이렇게 서두르냐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많이 서두른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서두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선 가장 큰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 알버타의 경기가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어서 내가 앞으로 언제 취직을 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캐나다 도착 후 겨우 3~4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돈도 벌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언제 취업이 될 수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이 너무나도 컸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로는 합격한 회사가 주정부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내가 캐나다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캐나다 아저씨들 사이에서 얼마나 영어로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주정부 기관에서 일을 한다면, 한국에서 경험으로 볼 때, 그래도 내가 갑의 입장일테니 영어나 차별에 대한 문제는 조금 적지 않을까 생각했다. 게다가 주정부 직업이면 왠지 일도 괜찮으면서도 안정적이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마지막 이유로는 사스카추완의 리자이나라는 곳이 당시까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동네였지만, 그래도 사스카추완주의 수도인데 어느 정도는 살만한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가족들에게 말은 안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점점 경기가 어려워지는 것으로 보아 내가 에드먼튼에 남아서 취업을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꿈같은 이야기고, 곧 저 북쪽으로 가야지만 취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나는 가정의 엄청난 불화를 일으키면서도 꼭 가고 싶어 하는, 아니 꼭 가야 된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로 전 글에서 이야기한 Keyera 라는 회사와 마지막 면접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예상보다 진행이 더디고 불투명하여서 곧 마음을 비우고 리자이나로 떠나기로 결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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